산수간에 집을 짓고

 

책소개

신선도 부러워할 집을 마련하여 품위있는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바람은 현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꿈이 아니다. 훌륭한 터를 찾아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여유롭고 운치있게 살고 싶었던 조선 시대 사람들의 꿈과 구성을 엮어 19세기 학자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 담았다.

우리가 보유한 옛 문헌 가운데 건축과 조경에 관한 내용을 전면적으로 풍부하며,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설명해놓은 저술한 <임원경제지>가 유일하며 독보적이다. 이 책은 그 가운데 ‘집’에 관한 기록만을 모아 엮었다.

우리땅의 산수와 환경에 따라 어떤 곳에 터전을 마련하고 어떻게 집을 짓고 꾸미며, 어떤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에 대한 선인들의 친절한 대답이 담겨 있다. 이 책에 실려있는 옛사람의 집짓기에 대한 지혜와 미학은 현대에도 여전히 의미를 지닌 부분이 많아 건축과 조경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이나 전문가들에게 흥미로운 상상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저자소개

서유구서유구 지음
1764~1845. 조선 정조·순조 연간의 학자이자 문인, 관료이다. 정약용과 더불어 19세기를 대표하는 대학자이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준평準平, 호는 풍석楓石이다. 전통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고, 수학과 농학, 과학과 기술에도 해박하였다. 소론 명문가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고위관료를 역임하였다. 20년 가까이 정계로부터 축출되어 지내는 장년기에 『임원경제지』의 편찬을 시작하여 30여 년에 걸쳐 114권으로 완성하였다. 조선 사람의 실생활을 개선하고, 윤택하고 여유 있는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데 저술의 목적을 두어, 『금화경독기』를 비롯한 많은 실학 저술을 남겼다. 이외에도 124종의 조선 학자의 저술을 엮은 『소화총서』와 시문을 모은 『풍석고협집』, 『금화지비집』, 『번계시고』의 작품집이 있다.안대회 엮어옮김
연세대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문학박사이며, 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를 거쳐, 현재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에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1999), 『한국 한시의 분석과 시각』(2000), 『조선 후기 시화사』(2000), 『윤춘년과 시화문화』(2001) 등이 있고, 역서에 『소화시평』(1994), 『선집 한서열전』(1997), 『궁핍한 날의 벗』(2000), 『북학의』(2003), 『나를 돌려다오』(2003) 등이 있다.문집으로?『연암집』이 전한다.

목차

책머리에
일러두기
1부 은자가 사는 집 – ‘이운지’怡雲志, 형비포치衡泌鋪置
이운지에 대하여
은자가 사는 곳
은자가 즐기는 곳
은자의 문화 공간
은자의 가구 배치
2부 터잡기와 집짓기 – ‘상택지’相宅志
상택지에 대하여
어디에 지을 것인가
어떻게 지을 것인가
3부 집짓는 법과 재료 – ‘섬용지’贍用志
섬용지에 대하여
집짓는 법
집짓기의 재료
실내 도구 및 기타
해제 –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통해 본 옛사람의 주거 미학
이 책의 인용 도서

출판사 서평

신선도 부러워할 집을 마련하여 품위 있는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바람은 현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꿈이 아니다. 훌륭한 터를 찾아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여유롭고 운치 있게 살고 싶었던 1, 2백 년 전 조선시대 사람들의 꿈과 구상을 엮어 서유구는 위대한 저술 『임원경제지』에 담아냈다. 우리가 보유한 옛 문헌 가운데 건축과 조경에 관한 내용을 이렇게 전면적으로 풍부하게,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설명해놓은 저술은 『임원경제지』가 유일하면서도 독보적이다.

『임원경제지』 중 ‘집’에 관한 기록만을 모아 엮은 『산수간에 집을 짓고』는, 우리 땅의 산수와 환경에 따라 어떤 곳에 터전을 마련하고, 어떻게 집을 짓고 꾸미며, 어떤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에 대한 선인들의 친절한 대답을 담고 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옛사람의 집짓기에 관한 지혜와 미학은 현대에도 여전히 생생한 의미를 지닌 부분들이 많아, 건축과 조경에 관심을 가진 많은 교양인이나 전문가들에게 흥미로운 상상거리를 제공한다.

18∼19세기 지식인들이 꿈꿨던 이상적인 주거공간

집이라는 인간의 거주공간이 지닌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옛 선인들은 집 그 자체에 대해 말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거의 유일하게 집 자체를 논의선상에 올려놓고 파고 든 사람이 바로 서유구이다. 그가 쓴 책 『임원경제지』에는 집에 관한 상상과 설계, 당시 주거공간의 실상을 파헤친 보고와 탐구, 주거물의 개량과 선진 공법의 도입, 조형예술로서의 집에 대한 미학의 제시 등 예상을 뛰어넘는 내용이 풍성하게 펼쳐져 있다. 서유구는 한국인이 살아온 집에 대해 가장 폭넓고, 가장 완전한 체계를 갖추어, 가장 깊이 있게 글을 쓴 최초의 사람이다.

이 책에는 18세기 후반에서부터 19세기 전반기에 이르는 시기에 최고 수준의 지적이고 세련된 사람이 생각한 주거문화가 담겨 있다. 당시 서울과 지방의 대도회지 사람들은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주택문화와 정원 조성, 새로운 주거 형태에 열의를 보였다. 18세기 후반 서울에는 담장이 너무 길게 뻗어서 만리장성가萬里長城家라고 불린 집도 있었고, 이은처럼 2백 칸에 육박하는 서울의 대저택을 소유한 자도 있었다. 또한 심상규沈象奎의 대저택(현재 미 대사관저 자리)을 비롯, 명문가들과 경제력이 풍부한 중인 서민들의 대저택과 별장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서유구는 이렇게 팽배했던 주거에 대한 당시의 욕구를 이 책에 반영하여 썼다.

『임원경제지』에 드러난 서유구의 주거미학

1) 자연친화적이면서 편리한 삶을 위한 주거공간
아름다운 산수를 기본 전제로 하며,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넓은 전답과 물건을 편리하게 사고팔 수 있는 교통의 편리를 갖춘 곳을 좋은 주거지라고 보았다. 집터를 선택하는 ‘여섯 가지 조건과 여섯 가지 요소’(p.104)에서 그는 아름다운 산수를 기본으로 인정하면서 집 주변에 “수십에서 일백 호에 이르는 집이 있어서 도적에 대비하고, 생활필수품을 조달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2) 전통적 풍수의 적용과 독립
풍수설와 음양오행설을 기본으로 집자리를 선택하고 주택이나 우물, 문을 내는 등 주택의 모든 지리적 조건과 위치와 방향을 결정하지만, 서유구는 미신적인 금기禁忌를 언급하면서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경험적인 태도를 지키려 노력하였다.

3)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개발
서유구는 새로운 건축 기법이나 기술을 도입하거나 개발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특히 건축제도와 건축자재 및 실내도구를 다룬 3부에서는 명분이 아니라 효율과 이익을 중시하는 현실적 관점으로 다양한 주거 형태와 새로운 건축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4) 실용과 멋의 조화
서유구는 장서藏書, 독서讀書, 의숙義塾, 손님 접대용 건물과 같이 서민용 주거에서는 실현할 수 없는 문화공간을 주거공간에서 확보하려 하였다. 또한 주변의 계산승지溪山勝地를 조망하기 위한 연못과 누정 같은 풍경 공간의 확보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 외에도 창문, 의자, 담요 등 실내외의 소품 취향은 우아하고 세련된 멋을 드러낸다.

서유구 vs 정약용

조선왕조 5백 년 동안의 학문의 역사에서 마지막 찬란한 빛을 발하는 때가 바로 19세기 전반기다. 이 시기의 학술은 전반적으로 침체의 국면을 맞이하고 있지만 위대한 학자 세 사람이 있어서 쓸쓸하지 않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풍석楓石 서유구徐有찀(1764~1845),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1788~1856) 세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이 세 사람은 조선왕조 5백 년 전체를 놓고서도 가장 박식한 학자다. 특히 세 사람 가운데 정약용과 서유구는 여러 측면에서 대비되면서 쌍벽을 이룬 학자다.

겨우 두 살 차이의 정약용과 서유구는 방대한 저작을 남긴 대표적인 박학자라는 점, 학문을 좋아한 정조正祖의 직접적인 훈도를 받은 학자라는 점, 정조 사후 20년 가까이 정계에서 축출당하여 귀양지에 억류되었거나 재야에서 고생하였다는 점, 그 사이 시대를 대표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점, 허황한 학문을 지양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을 추구한 점, 위기의식을 지니고 민생을 구제할 방도를 찾기에 노력한 점, 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최신의 학술 경향을 수용하려 노력한 점 등등 둘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너무 많다.

이 두 사람은, 허황한 학문을 지양하고 조선의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할 실용적 학문을 철저하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학문의 대상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정약용이 경제와 제도, 국방 등 국가 제도의 개량을 주방향으로 삼은 반면, 서유구는 실생활에 필요한 농업과 의학, 산업의 발전을 주방향으로 선택하였다. 다시 말해, 정약용이 경세치용經世致用에 주력하였다면, 서유구는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급격한 쇠락의 길을 밟고 있던 19세기 전반기에 두 학자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그 누구도 따라가기 어려운 학문적 업적을 세웠다. 두 사람 이전에도 그와 같은 방대한 작업을 한 학자가 없었고, 두 사람 이후에도 없었다. 전무후무한 일이다.

책속으로

“산에서 살아가는 법은 네 가지가 있다. 나무는 일정한 순서대로 심지 않고, 암석은 위치를 규칙적으로 배열하지 않으며, 가옥은 지나치게 크고 넓게 짓지 않으며, 마음은 세상사에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 p.16

“호수에 있는 마름, 연꽃, 물고기, 새와 같은 동식물은 인공을 가함이 없이 자연 그대로 번식하고 성장하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굳이 주인이 번거롭게 그 배치에 관여하지 않도록 한다.” — p.31

“뜰과 벽면 사이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금붕어를 기른다. 금琴을 탈 때마다 금붕어에게 먹이를 던져주면 금붕어는 앞을 다투어 받아먹는다. 여러 차례 그와 같이 하면, 그 뒤에는 슬기둥 당당 금을 타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먹이를 던져주지 않아도 반드시 금붕어가 물 밖으로 튀어 나온다. 이러한 장면을 본 손님들은 금붕어들이 먹이에 욕심이 있어서 그런 줄은 모르고, 호파(瓠巴: 춘추시대 초나라의 금의 명인이다. 그가 금을 탈 때에는 새들이 춤을 추고 물고기들이 튀어 올랐다 함)가 다시 살아 나온 줄로 착각할 것이다.” — p.59

“꽃병의 양식에 따라서 크고 작은 낮은 탁자 위에 놓아둔다. 봄과 겨울에는 구리로 만든 병을, 가을과 여름에는 자기로 만든 병을 사용한다. 대청과 큰 방에는 큰 꽃병을, 서실에는 작은 것이 어울린다. 구리나 질그릇으로 만든 것을 귀히 여기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 것을 천하게 여긴다. 고리가 있는 것을 꺼리고 쌍쌍이 두는 것을 꺼린다. 꽃은 마르면서도 교묘한 것이 어울리고 번잡한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한 가지를 꽂을라치면 기이하고도 예스런 가지를 골라야 하고, 가지 두 개를 꽂으려면 높고 낮게 꽂아야 한다. 가지를 합하여 꽂는다 해도 한두 종만을 꽂아야 한다. 너무 다양하면 영락없이 술집과 같다. 가을꽃만은 작은 화병에 꽂는다. 어떤 꽃인가를 따질 것 없이 창문을 닫아건 채 향을 피워서는 안 된다. 연기에 노출된 꽃은 바로 시들기 때문인데 수선화가 특히 심하다. 또 그림을 걸어둔 탁자 위에는 꽃병을 놓아두지 않는다.” — p.90

“재물과 이익이 몰려드는 곳은 거처할 수 없다. 배나 수레가 몰려들고 시정市井의 이익을 다투는 곳은 시끄럽고 소란하여 싫증이 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풍속도 반드시 아름답지 않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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