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경제지 섬용지 2 건축 도구 일용품 백과사전

책소개

풍석 서유구 선생이 저술한 『임원경제지』 16지 가운데 주거생활, 일상용품과 관련한 전반적인 지식과 정보를 담고 있는 9번째 지(). 집 배치 방법부터 터다지는 법, 지붕 이는 법, 외양간, 곡간, 변소, 우물 만드는 법, 목재와 석재, 벽돌, 기와 등을 만드는 법과 사용하는 법, 집에서 살면서 필요한 온갖 생활용품을 만드는 방법이 낱낱이 적혀 있어서 당시 조선 사람들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도구를 사용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생활상을 생생히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 소개

서유구

저자 : 서유구
저자 풍석 서유구楓石 徐有?(1764~1845)는 본관은 달성(대구), 경기도 파주 장단이 고향이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로서 규장각 제학, 전라 관찰사, 수원 유수, 이조 판서, 호조 판서 등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했음에도 경학이나 경세학보다는 천문ㆍ수학ㆍ농학 등 실용 학문에 심취했던 서명응(조부), 서호수(부), 서형수(숙부)의 가학(家學)에 깊은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 최고의 실용백과사전이자 전통문화 콘텐츠의 보고인 《임원경제지》 113권을 저술했다.
토갱지병(土羹紙餠), 즉 ‘흙으로 끓인 국이나 종이로 만든 떡’처럼 입으로만 만리장성을 쌓는 관념적 학문에 염증을 느낀 풍석은, 사대부라면 누구나 즐겼던 시 짓기도 거의 하지 않았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고향인 임진강변 장단에서 직접 농사짓고 물고기 잡으며, 술 빚고 음식 만드는 부엌을 드나들면서, 임원(林園)에 사는 선비로서 가족을 건사하고 덕을 함양하는 데 필요한 전반적인 실용 지식을 집대성하는 데 전념했다. 이를 위해 조선과 중국, 일본의 온갖 서적을 섭렵하여 실생활에 필요한 각종 지식을 체계적으로 모으는 한편, 직접 체험하고 듣고 관찰한 내용을 16분야로 분류, 엄밀하게 편찬 저술하기 시작했다.
관직에 복귀한 뒤 호남 지방에 기근이 들자 굶주린 백성을 위해 《종저보》를 지어 고구마 보급에 힘쓰기도 했던 풍석은, 재야나 한직에 머물렀던 당시의 여느 실학자와 달랐다. 실현 가능한 개혁을 추구하는 조정의 최고위 관료였고, 농부이자 어부, 집 짓는 목수이자 원예가, 술의 장인이자 요리사, 악보를 채록하고 거문고를 타는 풍류 선비이자 전적과 골동품의 대가, 전국 시장과 물목을 꿰고 있는 가문 경영자이자 한의학과 농학의 대가였다.
늙어 벼슬에서 물러나 그동안 모으고 다듬고 덧붙인 엄청난 분량의 《임원경제지》를 완결한 그는 경기도 남양주 두릉에서 82세의 일기를 다했다. 시봉하던 시사가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운명했다고 한다.

역자 : 임원경제연구소
역자 임원경제연구소는 고전 연구와 번역, 출판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사단법인이다. 문사철수(文史哲數)와 의농공상(醫農工商) 등 다양한 전공 분야의 소장학자 40여 명이 회원 및 번역자로 참여하여, 풍석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완역하고 있다. 또한 번역 사업을 진행하면서 축적한 노하우와 번역 결과물을 대중과 공유하기 위해 관련 전문가 및 단체들과 교류하고 있다. 연구소에서는 번역 과정과 결과를 통하여 ‘임원경제학’을 정립하고 우리 문명의 수준을 제고하여 우리 학문과 우리의 삶을 소통시키고자 노력한다. 임원경제학은 시골 살림의 규모와 운영에 관한 모든 것의 학문이며,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실천적 방책이다.

정명현
고려대 유전공학과를 졸업하고, 도올서원과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서울대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전통 과학기술사를 전공하여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담긴 해양박물학의 성격〉과 《서유구의 선진농법 제도화를 통한 국부창출론》으로 각각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본리지》를 김정기와 함께 번역했고,《본리지》의 설명대로 파주에서 텃밭 농사를 아주 조금 짓고 있다. 또 다른 역주서로 《자산어보》가 있고, 현재 《인제지》 번역 사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임원경제연구소 공동소장이다.
이동인
청주대 역사교육과에서 꿈을 키웠다.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연수했고,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수원시정연구원 수원학연구센터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강민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건축역사를 전공하여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건축사를 연구해 왔으며, 주요 저서로 《3칸×3칸:한국건축의 유형학적 접근》(2006)과 《도리구조와 서까래구조:동아시아 문명과 목조건축의 구조원리》(2013) 등이 있다. 건축도시공간연구소 국가한옥센터장을 역임하면서 다수의 한옥과 문화재 정책연구를 수행한 경험이 있으며,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태완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에서 공부했고, 〈조선후기 구황식품의 활용에 대한 연구〉로 석사를 마쳤다. 《임원경제지ㆍ본리지》,《정조지》의 일부와 《섬용지》,《전어지》 등의 교열에 참가했다. 수원화성박물관을 개관하는 데 일조했고, 현재 부천교육박물관에 재직 중이다.

최시남
성균관대학교 유학과 학사 및 석사를 마쳤으며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성균관한림원과 도올서원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현재 IT 회사에 근무하며 조선시대 왕실 자료와 문집, 지리지 등의 고전적 디지털화 작업을 하고 있다.

차서연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에서 전통섬유공예를 전공하면서 전통의상 제작을 접했다. 단국대 전통의상학과에서 〈서유구의 복식관:《섬용지》 ‘복식지구’를 중심으로〉로 석사를 마쳤다. 전통의상을 제작하는 것보다 복식사를 연구하는 것이 더 시급함을 느끼고 태동고전연구소 한학연수과정을 수료한 뒤 단국대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섬용지》 역주 참여를 토대로 삼아 조선시대의 복식관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목차

『섬용지』 권3 해제
일러두기

섬용지 권제3

복식 도구
1. 쓰개
2. 옷과 갖옷
3. 이부자리
4. 띠와 신발
5. 기타 장신구
6. 여자의 복식
7. 바느질에 쓰는 여러 도구
8. 의복의 보관

몸 씻는 도구와 머리 다듬는 도구
1. 몸 씻는 여러 도구
2. 머리 다듬는 여러 도구
3. 흙반죽 재료
4. 기와와 벽돌
5. 도배 재료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구
1. 와구(누울 때 쓰는 도구)
2. 앉을 때 필요한 도구
3. 가리거나 막는 여러 도구
4. 기타 도구

색을 내는 도구
1. 채색
2. 기름과 옻
3. 훈염(스며들게 하여 물들이기)

출판사 서평

『임원경제지』 완역, 완간을 향한 대장정의 첫발을 내딛다
『섬용지』는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 『임원경제지』16지 가운데 건축과 생활용품 및 생활도구에 관한 제반 지식을 담고 있는 생활백과이다. 『임원경제지』는 조선 후기 실학자 풍석 서유구 선생이 우리의 전통문화와 생활지식을 16분야로 나누어 집대성한 백과사전이다. 서유구는 관념에 치우친 유학자들의 학문적 태도에서 벗어나 사람살이의 기본인 ‘건실하게 먹고 입고 사는 문제’를 풀고자 민중의 생활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조선?중국?일본의 서적들을 풍부하게 참조하여 이 거작을 저술하였다.
학자들 사이에서 ‘조선판 브리태니커’라 불릴 정도로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 『임원경제지』는 그 학술적,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왔음에도 워낙 방대하고 전문적인 저술인 탓에 그동안 우리말로 완역되지 못했다.
『섬용지』 발간은 고전연구와 번역 출판을 위해 만들어진 임원경제연구소의 소장학자 40여 명이 풍석문화재단과 손잡고 진행해온 『임원경제지』 완역 사업의 첫 성과물이다. 음식, 의류, 건축, 건강, 의료, 의례, 예술, 지리, 상업 등 조선 및 동아시아의 의식주 문화를 망라하고 있는 『임원경제지』는 조선 최고의 실용서이자 우리 민족 최대의 전통문화 콘텐츠로서, 전통문화 연구는 물론 관련 산업 발전을 촉진하고 한류의 세계화를 이끌 원천이 될 것이다.

『섬용지』, 전통 건축·도구·일용품에 관한 모든 지식을 담다!
4권 2책, 총 99,167자로 이루어진 『섬용지』는 우리나라 옛 문헌에서 가장 취약했던 분야 중 하나로 알려진 기술 분야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이다.
섬용(贍用)은 ‘쓰는 물건을 넉넉하게 한다’는 뜻이다. ‘쓰는 물건’이란 임원에 거주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다. 집을 비롯하여 일상의 주거공간에 필요한 집 재료나 가구 및 소품 일체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섬용지’라는 제목에는 이러한 물건들을 제대로 만들고 제대로 활용할 줄 알아야 넉넉하게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섬용지』 권1은 [건물 짓는 제도], 권2는 [건물 짓는 재료], [나무하고 물 긷는 도구], [불로 요리하는 도구], 권3은 [복식 도구], [몸 씻는 도구와 머리 다듬는 도구], [방 안의 도구], [색을 내는 도구], 권4는 [불 때거나 밝히는 도구], [탈것], [운송 기구] [도량형 도구], [공업 총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섬용지』에서 주로 소개하는 물건들은 가옥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 그리고 주요 일용품과 배 · 수레 · 가마 등 교통수단, 흙 · 나무 · 돌 · 금속 등 원재료와 이것들로 가공하여 만든 갖은 공산물들이다. 서유구는 당시에는 너무 흔해빠져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던 물건조차도 하나하나 모두 적어놓았다. 덕분에 요즘은 보기 힘든 갈퀴, 망태기, 튀김용 국자, 바탱이, 자배기, 배자, 양칫물사발, 세숫대야 깔개, 세수치마, 민자, 빗 상자, 양탄자, 금박, 은박 등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실용정신과 애민정신의 산물
‘백과사전’이라 하면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나열한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서유구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낙후된 제도와 도구를 개선할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일례로, 권1 [건물 짓는 제도]에서는 한옥의 6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가옥에서 나오는 찌꺼기나 배설물을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구조적 배치에 신경 쓰라고 제안한다. 이는 서유구가 단지 지적 유희나 호기심이 아니라 실용정신과 애민정신에 바탕해서 민중의 삶을 개선하고자 이 거작을 저술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나는 농사짓는 도구와 옷감 짜는 물품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제조법 가운데 여러 가지가 거칠고 뒤떨어짐을 이전에 논한 적이 있다. 후생(厚生)의 근원이 되는 분야에서 아마도 법도대로 다 하지 못한 점들이 있었으리라. 그런데 생활용품 분야[贍用]에 이르러서는, 한숨이 나올 만한 곳이 반 이상이 훨씬 넘는다.
지금 이 『섬용지』는 목차가 13개로 구성되어 있으나 한 항목이라도 한숨이 나오지 않는 곳이 없다.”
– 『섬용지』 서문 중에서

서유구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은 장인의 손길을 거쳐 소량으로 상품이 생산되던 가내수공업 시대인데, 조선은 상공업 천시 풍조로 인해 ‘거칠고 졸렬한’ 수준의 물품만이 생산될 뿐이었다. 이에 서유구는 중국에서 물품을 들여오는 것은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온 오랜 관습으로 여겼지만 일본산까지 수입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는 데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섬용지』 서문에서 읽는 이에게 조선의 기술 수준에 분개하라고 쓸 정도였으니까. 서문에서 시작된 이런 풍석의 ‘반성’은 『섬용지』의 마지막 주제인 ‘공업 총정리’까지 이어진다.

이용후생의 꿈을 담다
『섬용지』에 수록된 내용은 거의 모두 당시 천대받던 장인의 전문 영역이다. 전혀 다른 전문 분야를 같은 지에서 다룬 것도 놀라운데, 당시 조선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짐승 가죽을 가공하여 각종 공예품을 제작하는 ‘갖바치’는 당시 최하층 천민이었다. 그럼에도『섬용지』에는 “뼈·뿔·가죽 다루기”를 통해 이 갖바치의 세계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신분 질서가 엄했던 조선 후기에, 이들의 기술과 지식을 글로 정리한다는 시도 자체가 최고위층 사대부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천민인 갖바치와 접촉하는 것 자체를 꺼리던 시절, 신분의 장벽을 무시하고 그들 작업의 핵심에 접근하여 그 내용을 기록한 까닭은 무엇일까?
『섬용지』에서 장인의 모든 영역을 다룬 이유는 [섬용지 서문]에서도 드러나지만 권4의 마지막 소제목(공업 교육)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서유구는 조선의 기술 수준이 낮고 도구도 좋지 않아서 중국산과 일제가 아니면 봉양과 장사, 제례에서 예를 제대로 차릴 수 없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이렇게 된 원인을 사대부에게 돌린다. 나라에는 크게 6가지 직분(왕공王公, 사대부, 장인, 상인, 농부, 길쌈아낙)이 있는데, 장인의 직분인 공업 제도가 잘못되어 나머지 5가지 직분까지 엉성해졌다고 분석했다. 농법·수차 제도를 강구하지 않아 농부의 직분이 엉성하고, 길쌈 도구가 갖춰지지 않아 길쌈아낙의 직분이 엉성하고, 수레·배가 제 역할을 못해 상인의 직분이 엉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네 직이 엉성하니 왕공과 사대부의 직분도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고 통박한다.
서유구는 사대부들이 농·공·상을 천시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농·공·상은 선현과 성인도 기꺼이 실행한 분야라며 옛 풍습을 되살릴 것을 강조했다. ‘도구를 편리하게 하고 쓰임새를 이롭게 하는 방도’에 마음을 두고 기술서를 연구하여 실질적 효과를 백성에게 보여주는 것이 군자, 즉 사대부의 역할이요 의무라는 것이다.
서유구는 사대부의 역할이 공업 제도가 제대로 일어나도록 하는 데 있다는 신념을 『섬용지』에서 몸소 실천했다. 최고위 관료를 지내고 규장각 제학을 비롯하여 6조 판서를 두루 역임한 그가 창문 문살 만드는 법을 알리고, 화장실 구조를 소개하고, 아녀자의 규방 용품에도 전문적 언급을 보태고, 솥땜장이의 작업과 갖바치의 섬세한 세공까지 밀착 취재해 일일이 기록해두었다. 방대하고 세세한 분야에까지 관심을 기울였고 그 활동 결과를 글로 남긴 것이다. 이는 『섬용지』를 저술한 목적이 이용후생(利用厚生, 기구를 편리하게 쓰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넉넉하게 하여 백성의 생활을 나아지게 함)에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책속으로

우리나라에서 쓰는 털모자는 모두 중후소(中後所)에서 만든 것이다. 모자 만드는 방법은 매우 쉬워 양털만 있다면 나라도 만들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양을 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일 년 내내 양고기 맛을 모른다. 우리나라 온 지역의 남녀 인구수가 수백만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데, 사람들이 털모자 하나씩을 쓴 뒤에야 겨울을 날 수 있다면, 해마다 동지사행(冬至使行)의 황력재자관(皇曆齎資官)이 가지고 가는 은화가 10만 냥 이하로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10년을 통틀어 계산하면 백만 냥이나 된다. 털모자는 한 사람이 겨울 3개월 동안만 쓰는 물건이니, 봄이 된 뒤에 해어지면 버리게 된다. 천 년을 가도 망가지지 않을 은을 겨울 3개월만 쓰면 해어져서 버릴 털모자와 바꾸고, 산에서 캐내는 한정된 자원인 은을 한번 갔다 하면 되돌아오지 않을 곳에 보내 버리니, 어쩌면 이토록 생각이 없단 말인가?
—「[복식 도구] 1.쓰개 11)털모자」중에서

겨울밤에는 솜이불로 몸을 덮는데, 목화솜은 두꺼워야 한다. 얇으면 추위를 막기 어렵다. 봄가을에는 솜이불이 또한 얇아야지 두꺼우면 너무 따뜻해서 땀이 많이 나기 때문에 오히려 이불을 덮을 수 없다. 그 결과 종종 몸을 내놓아 감기에 걸리게 되니 매우 불편하다. 부귀한 집안이라면 3~5채의 요와 이불을 모두 쉽게 마련할 만하지만, 평범한 집에서는 그럴 수 없을 듯하다.
그리하여 내가 직접 보잘것없는 방법을 고안해 보았는데, 아주 얇은 솜이불 2채에 각각 솜을 쟁여 넣고 만들어서 나누거나 합칠 수 있게 한다. 가령 이불 1채에 목화솜 6근을 써야 한다면 솜을 둘로 나누어 각각 3근이 되게 한다. 겨울의 추위가 오면 두 이불을 겹쳐서 안을 대고 따로 무명 홑이불(홑청) 하나를 대어 네 가장자리를 듬성듬성 바느질해서 합친다. 봄이 와서 따뜻해지면 이불 하나를 떼어 내고 이불 하나만 남긴다. 안에 댄 홑이불은 주(綢)를 쓰든 베를 쓰든 구애받지 않고 바깥쪽에 있는 솜이불보다 조금 넓고 크게 대어 사람의 기름때를 막아 보호해야 한다. 이불을 빨아 풀을 먹일 때마다 안쪽에 댄 홑이불만 빨면 된다.
—「[복식 도구] 3.이부자리 2)두 채의 이불을 나누고 합치는 법」중에서

개가죽은 가장 따뜻하고 두껍지만 제대로 무두질하지 않으면 상당히 뻣뻣해진다. 게다가 새로 만든 것은 기름기가 있어 옷을 더럽히므로, 소의 골수를 뒷면에 발라 손으로 박박 문질러 주어야 한다. 매일 흙바닥에 닿게 펼쳐 놓고 햇볕에 말려 기름기가 땅으로 다 빠져나가게 한 뒤에 9장 또는 12장씩 잇대어 꿰매 요를 만들고 청색 무명으로 뒷면을 댄다. 가난한 사대부가 냉기를 막는 도구이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구] 1.와구(누울 때 쓰는 도구) 15)개가죽요」중에서

금칠을 한 탁자 위에 뜨거운 차나 술병을 놓으면 대부분 누렇게 되는데, 이때는 다만 탁자를 밖에 들어다 놓고 하룻밤만 서리를 맞히면 바로 예전처럼 반짝거리게 된다. 눈 속에 두면 더욱 효과가 빼어나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구] 2.앉을 때 필요한 도구 3)탁자 씻는 법」중에서

일본 사람들은 물건에 옻칠을 잘하기로 천하에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물건에 옻칠할 때 티끌을 가장 꺼리는데, 티끌만큼의 미세한 먼지도 칠을 뭉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왜인들은 칠을 하려 하면 반드시 칠할 도구를 가지고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먼지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고치솜이나 초(?)나 견(絹)으로 수없이 옻을 거른다. 그런 다음 비로소 옻칠을 하고서 그대로 선봉(船蓬) 안쪽 그늘에서 말린다고 한다. 지금 비록 그 방법을 전부 모방할 수는 없지만, 구석진 조용한 방을 골라 깨끗하게 바른 다음 다시 무명으로 휘장을 만들어 주변에 둘러치고, 옻칠을 할 때는 먼저 휘장과 칠장이의 옷에 물을 뿜어 약간 축축하게 한[먼지가 들러붙어 날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다음, 비로소 칠통을 열어 작업하되, 다른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색을 내는 도구] 2.기름과 옻 1)옻」중에서

추천평

풍석 할아버지는 진실로 조선 실학 정신의 체현자이자 새 시대를 열어 간 선구자.
– 서진석(대구서씨대종회 회장) 

당대에 만들고 쓴 실상을 현장감 있게 접할 수 있게 해 주는 『섬용지』는 전통 장인에게는 고향과 같은 책. 귀하고 또 감사한 책.
– 박종군(국가무형문화재 장도장) 

조선 전통 장인의 매운 손맛이 담긴 유일한 책. 읽다 보면 서유구 선생의 엄격하고도 자상한 눈빛을 대하는 듯하다.
– 이승희(대한민국 자수공예명장) 

『섬용지』는 우리를 조선 후기의 일상 풍경으로 안내해 준다.
– 이명훈(작가, 칼럼리스트) 

대립과 혼돈의 시대적 어둠 속에서 묵묵히 혼을 불사르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한 거인의 생애, 그 자체!
– 이학종(미디어붓다 대표) 

조선 후기의 일상용품과 그것들을 만들던 섬세한 손길이 오롯이 담겨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리운 것들이다.
– 최연우(단국대 전통의상학과 교수) 

마치 살아 있는 민속박물관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임원경제지』를 읽는 것은 2백 년 전 우리의 전통 일상생활을 즐기는 일이다.
장동우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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